"만약 1분 동안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1994년 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서 임청하가 던진 이 질문은, 수많은 영화 팬들에게 홍콩이라는 도시에 대한 로맨틱한 상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복잡한 도시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네 사람의 교차하는 삶을 담아낸 이 영화는, 홍콩의 일상적인 거리와 장소들을 마치 꿈결 같은 공간으로 변모시켰습니다.
90년대 홍콩의 네온사인과 좁은 골목길, 끝없이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와 북적이는 시장...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분위기를 간직한 홍콩의 거리들은 2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영화 속 감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중경삼림>의 발자취를 따라, 영화 속 주요 촬영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해보려 합니다. 지금부터 함께 걸어볼까요? 아마도 왕가위 감독이 말한 '1분'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홍콩 센트럴 지역, 특히 소호 거리 주변을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Mid-levels Escalator)는 <중경삼림>의 가장 상징적인 촬영지입니다. 양조위와 왕페이의 에피소드에서 빠질 수 없는 이 에스컬레이터는 약 800m 길이로 세계에서 가장 긴 옥외 커버형 에스컬레이터 시스템입니다. 영화에서 왕페이(페이 원)가 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양조위의 아파트를 바라보는 장면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낭만적인 장면으로 남아있습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홍콩의 가파른 지형 때문에 만들어진 독특한 교통수단으로, 20개의 에스컬레이터와 3개의 무빙워크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센트럴 비즈니스 지구에서부터 미드레벨 주거 지역까지 이어지는 이 시스템은 매일 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용합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에스컬레이터가 오전 6시부터 10시까지는 하행으로, 그 이후 자정까지는 상행으로만 운행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영화 속 시간대에 따라 인물들의 움직임도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주변에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점, 카페, 바 등이 있어 영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쇼호 지역으로 이어지는 구간에는 세련된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밀집해 있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며 다양한 맛과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행자들에게 추천하는 방법은 한번은 쭉 끝까지 타보고, 돌아올 때는 중간중간 내려서 거리를 탐험하는 것입니다.
일상과 로맨스가 공존하는 그레이엄 스트리트 마켓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옆에 위치한 그레이엄 스트리트 마켓(Graham Street Market)은 영화에서 왕페이가 일하는 장소로 등장합니다. 16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이 재래시장은 홍콩의 일상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 중 하나입니다. 신선한 농산물, 해산물, 고기 등을 판매하는 노점상들이 좁은 경사로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왕페이와 양조위가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이 마켓을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그려집니다. 특히 왕페이가 양조위의 아파트에 몰래 들어가 청소를 해주거나 물건을 정리해주는 장면들과 대비되어, 시장의 분주함과 개인의 외로움이 교차하는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현재 그레이엄 스트리트 마켓은 도시 개발로 인해 일부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활기찬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오후까지 지역 주민들과 요리사들이 신선한 재료를 구매하기 위해 찾는 이곳은, 관광객들에게도 홍콩의 진짜 모습을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카메라를 들고 시장을 천천히 걸으며 영화 속 장면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홍콩의 밤을 즐기는 란콰이퐁과 캘리포니아 레스토랑
센트럴 지역에 위치한 란콰이퐁(Lan Kwai Fong)은 홍콩의 대표적인 유흥가로, 영화 속에서 여러 밤 장면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약 90개가 넘는 바, 클럽, 레스토랑이 몰려있는 이 지역은 특히 밤이 되면 현지인과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홍콩 나이트라이프의 중심지입니다.
영화에서 양조위가 데이트를 준비하던 캘리포니아 레스토랑(California Restaurant)도 이 근처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실제 레스토랑은 현재 없어지고 그 자리에 캘리포니아 타워가 들어섰지만, 영화 팬들은 여전히 이 장소를 찾아와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립니다.
란콰이퐁은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와 가까이 있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이 지역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저녁 시간에 방문하면 영화 속에서 볼 수 있었던 네온사인 아래 북적이는 거리의 모습을 직접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맥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중경삼림>이 담아낸 홍콩의 국제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중경삼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 팁
<중경삼림>의 촬영지를 따라가는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다면, 몇 가지 팁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의 운행 시간을 기억하세요. 오전 6시부터 10시까지는 하행, 그 이후부터 자정까지는 상행으로만 운행됩니다. 영화 속 장면처럼 상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싶다면 오전 10시 이후에 방문해야 합니다.
또한, 이 촬영지들은 대부분 홍콩 센트럴과 침사추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어 지하철(MTR)을 이용하면 쉽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청킹맨션은 침사추이역에서 도보 3분 거리이며,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와 그레이엄 스트리트 마켓, 란콰이퐁은 모두 센트럴역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합니다.
무더운 홍콩의 날씨를 고려하면,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에 그레이엄 스트리트 마켓을 방문하고, 날이 저물면 란콰이퐁에서 저녁을 즐기는 일정이 좋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비가 내리는 날 청킹맨션을 방문해보세요. 영화에서 임청하가 빗속을 누비던 모습을 떠올리며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화의 감성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94년 개봉한 <중경삼림>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특별한 감성으로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홍콩이라는 도시의 빠른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영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존재하는 이 장소들은, 우리에게 시간을 초월한 영화의 마법을 선사합니다.
언젠가 여러분이 홍콩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을 때, 혹은 청킹맨션의 복잡한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문득 영화 속 대사가 귓가에 들려올지도 모릅니다. "57시간 후면 사랑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그때 여러분은 왕가위 감독이 창조한 그 특별한 세계 속에 잠시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삶은 계속해서 흘러가지만, 영화가 담아낸 순간들은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러 있으니까요. 홍콩의 거리를 걸으며, 여러분만의 <중경삼림> 이야기를 만들어보시길 바랍니다.